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태용호/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독일전/총평 (문단 편집) == [[독소전쟁]]과의 비교 == 전술한 전차군단의 패인 '오만과 방심' 탭에서 유튜버가 올린 댓글은 비록 이름값을 못한 독일에 대한 비난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지에서도 이 경기에 대한 히틀러 패러디물과 '[[히틀러]]도 이것보다는 잘 했다.'[* 히틀러와 제3제국이 독일의 흑역사인 상황에서 저런 글은 정말 독일 국가대표팀을 극렬하게 까는 말이다. 하다하다 히틀러랑 비교받는 상황이니], '이 경기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래로 러시아 땅에서 당한 최대의 참패이다.'라는 자조가 많이 나왔는데 실제로 [[독소전쟁]]의 소련과 독일의 상황을 이번 월드컵에서의 한국과 독일의 상황에 대입하면 역사가 반복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비슷하다. * '''1. 직전까지의 양국 간 전적''' 실제로 1차 대전에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있는 서부 전선에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면서 러시아를 상대한 독일을 제압하지 못했고, 결국 독일이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의 어려운 국내 사정을 이용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넓은 영토를 얻어냈기에[* 이 때문에 [[소련]]의 영토는 제정 러시아보다 영토가 작았다.] 상대 전적에서 독일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후술하겠지만 독일이 소련을 과소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독일과 러시아(소련)이 서로 전력을 다해 승패를 확실히 판가름낸 적은 없었다. 이 경기 이전 독일과 한국 사이의 전적을 보면 2승 1패로 독일이 앞서 있었고, 특히 2002년 최전성기였던 한국에게 전력 손실 측면의 우위를 활용하여 탈락의 아픔을 준 것도 독일이다. 그러나 독일은 한국에게 승리한 2경기에서 유리한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과 1점 차 신승을 거두었고, 친선전에서는 2점 차 완패를 당했으니 주고 받은 골득실이나 경기 내용을 비교하면 양국의 전적은 얼추 비슷했던 셈이다. ---- * '''2. 직전까지의 양국 전력과 그로 인한 결과 차이''' 독소전쟁 당시 독일은 1차 대전에서 고전했던[* 수도 근처 50km까지 갔지만, [[마른 전투]]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참호전으로 갔다.] [[낫질 작전|프랑스를 6주 만에 제압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까지 모두 점령하여 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큰 성공을 거둔다. 반면 소련은 2차 대전 직전인 [[겨울전쟁]]에서 국력이 훨씬 약한 [[핀란드]]를 합병하려 시도했다가 되려 몇 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졸전을 치르며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다. 비록 국력 격차가 너무 커서 소련이 승리했으나, 소련의 최고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직접적으로 이 전쟁을 지휘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서로에게 졸전의 책임을 전가하며 싸울 정도로[* 스탈린이 보로실로프를 비난하자, 보로실로프는 '[[대숙청|네가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여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비난하며 '''접시를 집어 던진다.'''] 당시 소련군이 보여준 모습은 심각했다. 마찬가지로 이 경기 직전까지 독일은 지속적으로 메이저 대회에서 4강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두며 기세가 높았던 반면 한국은 한 수 아래로 생각하던 중국과 카타르에게 패했고, 어쨌든 간신히 지역 예선은 통과했으나 조별 예선에서도 비록 1점 차 패배들이지만 2패를 당하며 부진을 거듭했다. ---- * '''3. 직전까지의 양국 지도자의 입지'''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뜻에 따라 총리가 되었고,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며, [[라인란트 재무장]]-[[오스트리아 합병]]-체코슬로바키아 합병-프랑스 점령 등을 연이어 성공시켜 군부와 대중의 지지를 얻어 위상과 정치적 입지가 확고하였다. 반면 스탈린은 비록 [[레프 트로츠키|자신보다 영향력이 컸던 경쟁자]]의 모난 성격과 이런저런 국내외 정세[* 적백내전으로 인한 경제 침체, 독일과 이탈리아 및 헝가리 등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사회혁명 불발, 서유럽 노조 간부들과 중도좌파 개량주의 정당들의 삽질 등등.] 때문에 어떻게 당 내에서 제일 경쟁력이 없는데도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서 정치적 위상이나 입지가 불안하였다. 후술하겠지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스탈린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충격을 받고 칩거했는데, 자신의 측근들이 대비책을 세우기 위해 그를 찾아오자 '''자신을 불신임하여 체포하러 온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당시 스탈린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했다.[* 물론 이는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연극을 했다고 보기도 한다. 전쟁 중에 최고 권력자를 바꾸면 더 큰 혼란이 예상된다는 것을 다수에게 각인시켜 독일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을 가려서 실각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해가 잘 안 간다면 [[선조(조선)|선조]]의 선위 파동, 1987년 대선에서 [[KAL기 폭파 사건]]으로 [[노태우]]가 당선된 것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더라도 실각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했다는 것은 당시의 스탈린은 전쟁 이후 갖게 되는 절대권력자의 모습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대숙청으로 유능한 인재들을 다 날려먹었지...~~] 마찬가지로 경기 이전 뢰프 감독은 수석코치를 거쳐 감독이 되는 독일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감독이 되었고, 십수 년 동안 연이어 성과를 내서 축구계는 물론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입지가 탄탄했다. 반면 신태용 감독은 [[울리 슈틸리케|전임 감독]]이 경질당해 긴급 소방수 역할로 감독을 맡게 되었고, 평가전들의 성적 부진과 본선에서의 2패로 많은 비난을 받으며 입지가 불안했다. ---- * '''4. 직전까지의 양국 내부 상황''' 전술했듯이 당시 독일은 최고 지도자 히틀러의 위상이 확고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점령한 프랑스도 [[앙리 필리프 페탱|페탱 원수]]를 내세워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소련의 정치적 상황은 전술했듯이 최고 지도자 스탈린은 위상이 확고하지 못해서 [[대숙청]]을 통한 공포에 의존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사회적으로도 소련에 적대적인 민족들이 군사적으로 저항하는 등 문제가 심각했다.[* 실제로 소련에 적대적인 민족들은 전쟁 초기 독일에 협조하다가 독일이 더 자신들을 심하게 탄압하자 대부분 등을 돌린다. 그러나 일부는 소련에 계속 저항해서 1950년대까지 그들에 대한 소탕 작전이 계속된다.] 마찬가지로 독일은 전국이 자국 대표팀과 감독에게 신뢰와 성원을 보내는 안정적인 모습이었으나,[* 대회 직전 [[메수트 외질|외질]]에 대해 비난과 반감이 있었지만, 실점과 관련된 오심 논란마저 덮어버릴 정도였던 [[장현수]]에 대한 비난과 반감에 비한다면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이 경기가 충격적인 패배로 끝나고서야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으로 그 동안 비판이 어느 정도 있었던 외질이 낙점된 것이다.] 한국은 계속된 졸전과 패배로 선수들의 실책과 신태용 감독의 선수 선발에 대해 비난 여론이 높아진 흉흉한 상황이었다. ---- * '''5. 직전까지의 양국 전력 손실''' 독일은 서유럽을 긴 소모전이 아닌 짧은 기간의 전격전으로 석권하면서 비교적 손실이 적었고, 그 결과로 전 유럽의 공업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으니 큰 의미 없는 손실이었다. 또한 독일에 대항할 국가가 영국뿐이었는데 섬나라이므로 영국을 대비할 일부 전력만 제외하면 자신들의 가용 전력(특히 육군) 거의 모두를 소련과의 전선에 동원할 수 있었다. 반면 소련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유능한 장군들이 숙청되고,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종심돌파이론]] 전략이 파기되는 등의 악재들로 인해 전술했듯이 국력이 훨씬 약한 핀란드에도 고전할 만큼 전력이 심각하게 약해졌으며, 그나마도 독소전쟁 초기 패전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으며 더욱 악화된다. 또한 소련은 [[일본 제국|일본]]과 [[만주국]]의 침공을 대비해 극동에도 상당한 병력을 항상 주둔시켜야 했다.[* 이 병력들은 '''수도인 [[모스크바]]가 위험한 상황에서도''' 유럽 전선으로 차출되지 않는다.] 독일의 전력 손실은 스웨덴전에서 퇴장당한 제롬 보아텡 정도였는데, 그나마 부상에서 회복된 마츠 후멜스의 출전으로 큰 의미가 없었다. 반면 한국은 본선 전부터 권창훈, 김민재, 이근호, 염기훈이 부상으로 낙마했고, 직전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중원의 핵심인 기성용까지 부상을 당하여 출전이 불가능했다. 2002년 4강 신화를 시작으로 2010년 우루과이를 진땀 흘리게 만든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압박 후 상대가 지치면 빠른 선수들이 역습한다'는 한국 국대의 기본 팀 컬러도 [[홍명보호]]에서는 [[티키타카]], [[슈틸리케호]]에서는 점유율에 집착하여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렇듯 한국 국대의 상징적인 모습이 '선수비 후역습', '건장하고 빠른 선수들이 주축'인 가장 큰 이유가 2002년 이전 월드컵들에서 독일, 벨기에, 스페인 등과 어느 정도 대등하게 맞선 전적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에 비해 선수들의 개인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극복하기 위함인데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 역시 나폴레옹 전쟁에서 어느 정도 활약했지만 [[크림 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에서 제정 러시아군의 훈련 상태가 상대적으로 적군에 비해 부족한 현실이 드러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함이었고, 기동성이 전략의 핵심이며, 적의 방어가 너무 철저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면 효과를 보기 어려운 전략이라는 것까지 유사하다는 것이다. ---- * '''6. 철저한 듯 보이나 사실 안이함의 극치인 독일의 계획''' '300만의 실전 경험이 풍부한 대군과 명장들을 동원하여 불시에 기습'이라는 독일의 소련 침공은 철저한 듯 보였지만, [[러시아 원정|이전 사례]]가 있음에도 [[동장군]] 대비를 안 했는데 전술한 독일과 소련의 상황들과 1차 대전의 동부 전선 결과를 근거로 [[히틀러]]는 물론이고 '''독일 전체가 소련을 너무 만만히 보며''' 소련이 가진 유럽 영토를 10주 안에 모두 빼앗고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프랑스 북부를 점령하는 데도 6주는 걸렸는데[* 프랑스 전체를 모두 실질 점령한 것은 [[https://en.wikipedia.org/wiki/Case_Anton|안톤 작전]] 이후이다.] 소련의 유럽 영토는 수도 [[모스크바]]가 포함된 국가의 중심지이고, 그 크기도 '''유럽 대륙의 절반 정도인''' 것까지 감안하면 당시 독일에서 얼마나 소련을 만만히 봤는지 알 수 있다. 분명 독일에게도 침공 이전 연합군의 [[됭케르크 철수작전|됭케르크 철수]]를 막지 못했고, [[영국 본토 항공전|영국을 굴복시키는 데 실패한]] 악재도 있었지만 소련 침공 계획이 발표되자 [[프랑스 침공]] 때와 달리 큰 반대조차 없었다는 것은[* [[낫질 작전]]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당시 프랑스 침공이 무모하다며 엄청난 반대가 있었고, [[헤르만 괴링]]은 '또 전쟁에서 지면 신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실까?'라고 비관했으며, [[프란츠 할더]]는 여차하면 '''히틀러를 죽이려고 한동안 권총을 지니고 다녔을 정도였다.'''] '''고작 이 정도 악재들로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리라고 독일의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공군력을 소련 침공에 동원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반대도 일각에서 나왔지만, 그건 독일의 상황을 걱정한 것이지 '''독일이 소련에게 질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독일 전체가 소련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 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독일은 철저하게 준비한 듯 화려하게 자신들의 1군을 선발로 내보내긴 했는데 자신들을 포함해서 여러 유럽 강팀들이 한국을 상대로 고전하거나 패배한 것을 잊은 것인지, 기억은 하는데 자신들이 상대 전적 상 우위에 있고 지속적으로 메이저 대회들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반면 한국은 경기 직전까지 지역예선부터 조별예선 경기들까지 부진한 것을 보고 다 옛날 이야기일 뿐이라 여겼는지 전술이 고도화된 현대 축구에서 제대로 된 분석이나 전략 없이 선수들의 개인 기량만으로 다득점 승리가 가능하다고 지나치게 한국을 과소평가한다. 심지어 독일은 자신들의 직전 평가전들과 본선 1, 2차전에서 경기력 부진이 드러났고 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국 정도는 가뿐히 이길 것을 전 국가적으로 확신했다.''' ---- * '''7. 독일을 상대하는 것에 대한 반응''' 당사자인 소련은 독일이 침공하자 국가 전체가 절망적인 분위기에 빠졌다. 전술했듯이 대숙청으로 매우 약해진 소련군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아는 최고 지도자인 스탈린과 소련 군부의 주요 장성들은 독일이 영국의 존재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결과를 떠올리며 [[양면전선]]과 동장군에 대한 부담감으로 최소한 1941년에는 소련을 침공하지 않으리라 예상했고,[* 게다가 독일이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으로 인해 전선을 발칸 반도로까지 확장한 것도 이러한 믿음을 부추겼다.] 또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이나 바람과는 다르게 독일이 자신들에게 [[바르바로사 작전|총공세]]를 가하자 가장 침착해야 되는 후방의 최고 지도층마저 패닉에 빠진다.[* 1인자 스탈린부터 독일의 침공 소식을 여러 전방 부대들에서 보고받고도 믿지 않다가 독일의 공식 선전포고가 확인되자마자 의자에 주저앉으며 절망했다. 이 선전포고를 소련에서 처음 확인한 사람은 상황을 확인하려고 독일 대사관에 찾아간 당시 소련의 2인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인데 선전 포고를 하는 적국 독일의 대사 앞에서 의연해야 했음에도 ''''우리가 귀국에 그럴 만한 짓을 했습니까?''''하며 당혹해 한다. 소련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연전연패하는 와중에 그나마 [[게오르기 주코프]]가 독일군을 저지할 전략을 강구하여 주장했으나, 그의 라이벌이자 군부 최고위 장성인 [[이반 코네프]]마저 '저지가 아니라 전멸이겠지.'라는 말로 자조할 정도로 소련 최고위층까지 절망감에 빠진 상황이었다.] 전 세계는 유럽을 석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을 패퇴시킨 러시아(소련)의 저력을 너무 몰랐고, [[할힌골 전투|이미 소련에게 크게 데여 본 경험]]이 있는 [[일본 제국|한 나라]] 정도를 제외하면[* 소련이 연전연패하며 모스크바가 위험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음에도 끝내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직전까지의 상황들만을 고려하여 독일의 완승을 예상하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독일과의 대결이 확정되자 전력 차이를 아는 한국에서는 팬들 뿐 아니라 축구인들이나 전문가들도 '열세이다.'라는 정도가 아닌 '승산이 없어 보인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절망감에 빠졌고, 그나마 승산이 있다고 보여진 스웨덴전과 멕시코전에서 연패하며 핵심 선수 기성용까지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더욱 분위기가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이 멕시코전 패배와 스웨덴전 신승으로 자신들의 16강 진출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한국이 내심 바랐던 '독일이 16강 이상을 고려하여 체력을 아껴 가며 적당히 한국을 상대하는 상황'도 기대할 수 없었다. 독일이 총력을 다한 전면전을 선언하자 한국 대표팀을 최대한 격려해야 할 한국 축구인들과 언론조차 '1%의 기적을 바란다.'는 상투적인 말만 반복했고, 기싸움을 위해서라도 의연해야 할 대표팀이나 축구협회 또한 승산이 적다는 것을 공공연히 인정했으며, 많은 한국 사람들은 기대도 하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전 세계는 언제나 전력 열세임에도 여러 번 세계적인 강팀들을 고전시키거나 꺾었던 한국의 저력을 너무 몰랐고, 한국의 경기력이 예상보다 좋다는 것을 직전 경기에서 직접 경험한 멕시코 정도를 제외하면[* 독일을 상대로 한국이 적게나마 승산이 있다고 본 [[박지성]]을 비롯한 일부 축구인들도 이유를 ''''독일의 경기력 부진''''으로 들었으나,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의 주장 [[미겔 라윤]]은 ''''한국의 경기력이 좋다.''''는 이유로 한국이 독일에게 승산이 있다고 봤다.] 직전까지의 상황들만을 고려하여 독일의 완승을 예상하였다. ---- * '''8. 전개''' 전쟁이 시작되자 예상대로 독일은 시종일관 우세했고, 소련은 수세에 몰린다. 그러나 소련 군민들은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이에 독일은 [[레닌그라드 공방전|레닌그라드 점령에 실패하고]], 소련의 수도이자 교통의 요지인 [[모스크바 공방전|모스크바도 불과 30km 남겨두고 공략에 실패하였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스탈린그라드에서도 일이 풀리지 않아서]] 예상치 못하게 러시아 땅에서 겨울을 맞는다. 이후에도 독일은 [[르제프 전투|완전히 무기]][[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력하지는 않았으나]],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등 주요 전투에서 연패하며 무너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경기가 시작된 후 독일의 점유율과 슈팅 개수는 한국보다 크게 앞섰고, 설상가상으로 심판 판정마저 독일에게 유리하게 내려졌다. 그러나 한국은 현격한 전력 열세와 불리한 여건에도 당 대회 최고 활동량으로 대표되는 불굴의 투지로 지난 경기들에서보다 훨씬 좋은 경기력을 보였고, 이에 독일은 우세함을 보이면서도 경기를 결정 짓는 득점을 하지 못하며 90분 내내 0:0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는데, 이는 [[레온 고레츠카]]의 헤딩슛이 [[조현우]]의 슈퍼세이브에 의해 막힌 것이 결정적으로 평가된다. 그 이후로도 독일은 지속적으로 공세를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한국에게 2실점을 당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 * '''9. 결과''' 결국 이 전쟁은 독일에게 수도를 함락당하며 무조건 [[항복]]하고, [[게르만족]]과 역사적으로 깊은 연관을 지닌 많은 영토들을 폴란드나 소련에 빼앗기며 남은 영토마저도 동서로 분열되는 자신들의 역사상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반면 소련에게 이 전쟁의 승리는 자신들의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자 자랑거리가 되었고,[* 소련 해체 이후로도 러시아는 물론 구소련에 속해 있던 국가들 모두 독일이 항복한 날을 성대히 기념한다. 자세한 것은 [[승리의 날]] 항목을 참조하면 된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위상이 크게 올라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한다. 마찬가지로 이 경기는 독일에게 '''아시아 팀에게 무득점 다실점 패배로 조별리그에서 최하위 탈락'''이라는 자신들의 역사상 최악의 결과를 낳았고, 피파 랭킹과 오랫동안 쌓아 온 축구 강국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추락했으며, 경기 이후로도 세대 교체나 인종 갈등 같은 문제들로 내부적으로 분열을 겪는다.[* [[메수트 외질]] 은퇴 관련해서 옹호와 비판으로 독일 국대나 축구계 뿐 아니라 여론도 갈라졌고, [[미하엘 발락|발락]]이 '[[요아힘 뢰프|뢰프]]가 아직까지 감독을 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며 간접적으로 비난하자, [[토니 크로스]]는 '본인(=발락)께서 감독 하시고 싶으신가?'하며 갈등을 키웠으며,[[https://m.sports.naver.com/news.nhn?oid=216&aid=0000096980|#]] 월드컵 탈락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독일 국대가 부진하자 뢰프 감독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져서 한때 뢰프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https://sports.v.daum.net/v/20181210125511761|#]] 이후 뢰프에 의해 [[토마스 뮐러]], [[마츠 훔멜스]], [[제롬 보아텡]]이 갑작스럽고 강제적인 국대 은퇴를 당하자 당사자들이 이에 반발했고, 그로 인해 독일의 수비 조직력이 불안해졌음에도 뢰프는 은퇴시킨 선수들의 국대 복귀 여지를 차단해 지속적으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인다. 독일은 이후 계속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2020-2021시즌 네이션스 리그에서 어찌저찌 회복세에 접어드나 싶었으나 스페인에게 6-0으로 박살나며 상처가 다시 터져버렸다.] 반면 대한민국에게 이 경기의 결과는 자신들의 역사상 최고로 영광스러운 승리로 기록되었고, 세계적으로 '독일을 조별예선에서 탈락시킨 나라'라는 위상을 얻었음은 물론, 이 경기의 승리를 기점으로 아시안게임 우승, 벤투호의 순항, K리그 관중 증가, U-20 월드컵 준우승, U-17 월드컵 16강, 한국 축구 첫 AFC U-23 챔피언십 전승 우승 등 축구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네이션스 리그]]로 유럽 팀들과의 평가전이 어려워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이 한국을 평가전 대상 1순위로 삼아 중계권 수익까지 양보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고,[* 보통 피파 랭킹 차이가 크면 친선 경기가 잘 성사되지 않는다. 강팀 쪽이 이겨도 득이 적고 지면 망신살에 피파 랭킹이 큰 폭으로 하락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이런 제의를 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티테]] 감독이 계속 '독일'을 언급했던 것을 볼 때 독일을 꺾은 한국이 갖는 상징적 의미가 브라질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짜 [[미네이랑의 비극|한]]이 맺힌 듯...--] 성사되자 상대 전적에서 압도적인 우위임에도[* 1999년 한국이 홈 경기에서 김도훈의 결승골을 앞세워 1:0으로 이긴 것을 제외하면 전패했다.] 양쪽 다 원정인 중동에서 자신들의 1군 스쿼드를 내보내 전력을 실험해보려 할 정도로 확실히 한국 국대의 위상은 이 경기를 기점으로 크게 상승했다.[* 비록 이 경기에서 브라질에게 0-3으로 패배하기는 했으나, 두 팀 모두에게 자신들의 장단점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던 유익한 경기였다. 또한 확실히 브라질이 모든 면에서 앞섰으나, 경기 내용도 매우 빠르고 공격적이었으므로 득점을 제외한 주요 지표들에서 브라질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소련과 한국 대표팀의 상징색이 붉은 색이라는 것까지 똑같다.-- 재미있게도 러시아 땅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우승한 프랑스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원정|러시아 땅에서 자신들 역사에 손꼽힐 만한 패배를 당한 적이 있는데]] 우승컵을 든 프랑스 대표팀의 모습에서는 과거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 프랑스 대표팀의 문제점이었던 '스타 플레이어 1명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선수단의 노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자 때문에 [[2002 월드컵]]에서 [[남아공 쇼크]], 후자 때문에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전 대회 준우승국이 1무 2패, 1득점 4실점으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이것은 어찌 따지면 러시아 원정과 똑같다. 불세출의 스타인 나폴레옹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프랑스군의 노쇠는 패배를 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이를 해결했다.] 이 월드컵의 결과는 그야말로, '''__"과거의 실패를 기억하는 자는 성공하고, 잊는 자는 실패한다."__''' 라는 교훈을 드러내고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신태용호/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독일전, version=4966)] [각주] [[분류:2018 FIFA 월드컵 러시아]][[분류:2018년 축구 경기]][[분류:FIFA 월드컵 경기]][[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분류: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분류: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분류:신태용호]][[분류:대한민국(21세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